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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들의 지진붕괴.


역사적인 건축물 그리고 그것들로 이루어진 도시들의 가치는 이미 금전적인 평가로도 대단하다. 

예를들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중세 유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수많은 도시들에 대해 수많은 관광객들은 그 어떤 매력을 느끼고 그곳으로 이끌린다. 그 도시에는 연중 수 많은 발걸음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건물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자. 

겉모습이 아름답고 잘 정비된 유명한 관광도시들만 아름다운 도시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 아름다운 건물과 도시란 그 안에서 그것을 만들고 짓들어 사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역사가 깊거나 멋진 건물들보다 우리가 누비던 골목 또는 아파트에 빼곡히 자리잡은 것들은 의미가 낮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또 살았던 그런 집들은 그저 그냥 그런 건물은 아니다.

건물의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건물 자체의 특이함과 그 마감재의 비쌈과 그리고 거기에 깃들어 사는 유명인의 삶의 역사적인 기록만 주시하지만, 그 진정한 가치는 서민들의 애환과 희망을 눈물과 절실함으로 기억하는 그런 보통의 건물들에게도 분명히 있다. 건물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단지 파사드(외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생명을 어떠한 경우에서도 지켜낼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겉모습만 아름다운 사람보다, 인성이 바르고 능력이 겸비된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인 것처럼.

우리 동양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아웅다웅하기도 하고 수많은 이야기 거리가 생산되는 도시들이 무수히 많다. 그 도시나 건물들의 역사는 깊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얕기도 하다. 인간사의 아름다움은 그런 별볼일 없을 것 같은 건물들 속에서 더 아름답게 키워지기도 한다.


탕산지진 직후 처참한 상황 <출처 : 중국신문사>


지진전조현상에 대한 성공과 실패. 중국 1975 하이쳉지진과 1976 탕산지진.


하이첸()은 중국 랴오닝(요녕)성 동부의 도시로, 농산물 집산지로 누에·견직·등유제조·양조공업이 발달한 농공업도시(1975년 M7.0 지진발생 당시 인구 약 1백만명)였다. 그리고 탕산은 허베이(화북)성의 광공업도시(1976년 지진 M7.5 지진발생 당시 인구 약 70만만명)였다. 약 일년의 간격으로 이 각각의 도시에 발생한 지진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1966년 3월에 베이징 남서 300km에 있는 싱타이에서 발생한 M7.2 지진 발생 후, 중국은 지진예보를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1971년 8월부터 중국지진국이 지진예보를 목적으로 지진 발생전에 나타나는 동물이상행동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4년 뒤 1975년 2월 4일 하이쳉지진 발생 전에 지진물리학적 전조와 동물이상행동에 대한 보고를 바탕으로 지진경보를 발동하고 성공적으로 시민들을 대피시킴으로 동물이상행동을 이용한 최초이자 마지막 지진예보였다. 그러나 1976년 7월 28일 발생한 탕산지진에서는 동물이상행동에 대한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진경보는 발동하지 않아 24만명 이상의 사망자(비공식적 80만명 이상)가 발생했다. 

당시 중국의 지진예보 철학은 지진전조가 일어나는 원리에 대한 이해보다는, 지진예보를 하기위한 전조현상을 찾는 것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고 정치적인 영향도 많이 작용했다. 그 자신감은 당시 모택동이 주장했던, '인간은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라는 신념이 정치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중국은 1964년 원자폭탄을 제작했고 1970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과학적 자신감이 넘쳤던 시기였기에, 지진예보 기술도 수년 내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1971년 중국과학원 산하에 지진국이 만들어진 이후, 1979년에 1344개의 시지진사무국이 있었고, 6천명이 이곳에서 일했고, 1만개이 아마추어 모니터링 관측소가 있었고 20만명의 아마추어 지진전조 모니터링 요원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지진 전조들은 지금의 관점에서 그 경보를 내린 과학적 근거를 찾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긴 했다.

1975년 헤이칭지진은 과학적 근거 여부를 떠나서 지진예측의 대표적인 성공사례임은 분명하다. 지진발생 직전에 나타난 전조현상들을 이용한 예보였으며 이 성공을 가능하게 한 것은 공무원들의 신속한 지진경보발령과 대피명령이었다. 비록 2,041명이 사망하였지만, 도시 건물의 50%가 붕괴·손상된 것을 감안하면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면 최고 15만명 이상 사망했을 것으로 추산되는 지진이었다. 

그러나 1976년 1월 8일 당시 2인자였던 중국 공산당 총리 주은래가 사망하면서 벌어진 추모회가 대중반란으로 불붙은 4월 천안문사건으로 모택동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고, 이 어수선한 국가상황에서 대중의 관심은 정치적 혼란이 어떻게 갈지를 가름하는 것에 흠뻑 몰두되어 있었다. 하이쳉지진 만큼 풍부한 전조 보고는 아니었어도, 모택동 고립 후 3개월이 지난 즈음의 탕산지진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전조들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과 지도부의 관심이 온통 정치로 쏠렸고, 공무원들의 지진대피명령이 이후 어떤 정치적인 속셈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기에 충분했고, 예측 실패시 정치적인 이유를 숨긴 책임을 지우기에 충분한 사회적 상황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단지 탕산지진의 지진예측이(결과적으로는 분명 실패했지만) 진정 전조현상으로 지진발생 예측을 하지 못한 사례라고 단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탕산지진의 전조현상으로는 지진발생 보름전에 탕산 인근의 한 우물에서는 하루에 세번씩 물이 솟구쳤고 다른 우물에서는 가스가 세차례나 새어나왔고 지진광 목격 제보도 있었다. 탕산 뿐만 아니아 주변 여러지역에서도 이상 징후들이 탐지되고 있었으며, 최초로 지진발생을 경고한 지진전문가 양유천 외에도 마시룽, 건칭궈 등 여러 지진전문가들과 국가지진국의 왕청민도 7월 22부터 8월 5일 사이에 대지진 발생가능성을 경고했는데, 실제 지각변동이 아닌 문화대혁명과 1차천안문사태로 인한 정치지각변동에만 촉각을 곤두세운 공산당 상층부들에게 하급 관리들의 경고는 정치적 민감사항으로 분류되어 묵살되었고, 오히려 최초 발언자 양유천은 인민들에게 불안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사상재건 노동교육을 받으러 끌려가기도 했다.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탕산시에서 불과 115km 떨어진 50만여명 인구의 칭륭현의 공무원들 뿐이었고, 이들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민들에게 지진대응 요령이나 건물안전점검, 지진발생 직전 대피명령 등 사전조치를 취하여 이곳에서는 사망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결국 탕산지진의 막대한 피해 원인은, 지진전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지진예보를 요구한 전문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지진전조현상에 대한 지진예보를 정치적 민감사항으로 여기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키는 것으로 치부하는 관료주의의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관료주의적 폐단이 지금 우리 주변에는 없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지진전조현상의 또다른 사례. 이탈리아 2009 라퀼라지진.


<출처 : 연구보고서, Nat. Hazards Earth Syst. Sci., 10, 967–978, 2010>


2009년 4월 6일, 이탈리아 라퀼라지진(M6.3). 지진발생 전에 전조현상으로 지진광이 99건 기록됐다. 본진 이후 M4.0 이상의 여진이 7개월 후까지 24건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사망 309명, 부상 1000여명, 이재민 7만명, 붕괴 ·손상건물 1만여채의 피해가 발생했다. 지진의 전조는 지진광 뿐만아니라, 지진발생 3개월전부터 미진이 잦았고, 특히 라돈가스 방출량이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탈리아 국립핵물리학연구소의 연구원인 지암파울로 줄리아니는 라돈방출량을 토대로 조만간 대규모 지진을 예측하고 정부에 보고했지만,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묵살당했다. 이에 그는 인터넷에 자신의 연구결과를 올려놓고 대중에 알리고자 했다. 2월 지속되는 미진에 염려했던 일부 시민들이 줄리아니의 연구결과를 접하고 확성기 달린 차량으로 대피를 호소하는 등 소동이 벌어졌고, 라퀼라 시당국은 줄리아니를 사회불안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경찰에 고발했고 인터넷에 올린 연구결과까지 강제 삭제했다.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미진들로 주민들의 불안은 더해 갔고, 결국 이탈리아 국립재난위원회 소속 과학자 6명과 공무원 1명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자문회의를 하기도 전에 한 과학자는 인터뷰에서 '이제 소파에 앉아서 와인을 마셔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했다. 자문회의는 45분만에 끝났다. 이 자문회의가 끝나고 일주일 후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인터뷰에서 과학자의 자신있는 주장을 믿고 다른 마을로 대피했다가 돌아온 사람들 중 29명이 참변을 당했다. 지진참사로 아내와 딸을 잃은 한 의사가 자문단을 고소했고, 2012년 1심에서 자문단 모두에게 과실치사죄가 적용되어 6년형이 선고 됐다. 전세계 과학계는 제2의 갈릴레오 재판이라며 비난을 쏟아냈고, 전세계 과학자 5200여명이 탄원서를 제출했다. 2014년 2심에서는 인터뷰에서 '네'라고 답한 그 과학자 1명을 제외하고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도 과학계의 의견대로 지진을 예측하는 것은 신의 영역임을 인정하여 그 예측하지 못한 책임까지 물을 수 없었고, 다만 주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섣불리 '네'라고 답한 과학자의 말, 그말을 믿고 돌아왔다가 지진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유가족이 주장한 과실치사를 일부 인정한 것이었다.


다음 편부터 지진전조현상의 종류들에 대해서 설명한다.



[ 출처 : , 지진에 대한 모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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